7장. 인터넷 거버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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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인터넷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규칙’이 필요하다. 우선 IP 주소와 도메인 네임, 그리고 기술적 프로토콜과 같이, 전 세계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네트워크로서 인터넷이 작동하기 위한 기술적인 조정이 필요하다. 또한 인터넷이 우리 삶과 사회의 일부가 되면서, 스팸, 보안, 저작권 등 인터넷으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와 같이 인터넷의 안정적인 운영, 이용과 관련된 공공정책의 결정, 그리고 그러한 정책의 원칙들과 정책결정 과정 등을 ‘인터넷 거버넌스(Internet governance)’라고 한다.  

인터넷 거버넌스를 최초로 규정한 국제 문서라고 할 수 있는 2005년 <정보사회를 위한 튀니스 어젠더(Tunis Agenda for the Information Society)> 34항에서는 인터넷 거버넌스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정부, 민간기업, 시민 사회가 각자의 역할을 통해, 인터넷의 발전 및 이용에 영향을 미치는, 공유된 원칙, 규범, 규칙, 의사결정 절차 및 프로그램의 개발 및 적용

거버먼트(government)가 아니고 거버넌스(governance)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정부의 책임과 역할만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참여자들 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코드는 법’이라고 한 로렌스 레식의 논리에 따르면, 초기 인터넷의 프로토콜을 정해온 엔지니어들이 인터넷이 작동하는 법을 만든 셈이다. 한국이 .kr 이라는 국가 도메인을 갖게 된 것은 유엔(UN)에서 정부간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초기 인터넷 엔지니어들이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기술 표준 뿐만 아니라, 규범도 중요하다. 예컨데, 인터넷 보안과 관련하여 기업의 기술적 조치나 정부의 규제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으며, 보안을 위한 이용자의 행동지침 같은 것도 필요하다. 아동포르노와 같은 콘텐츠를 규제하기 위해 공공기관, 민간단체, 인터넷기업 등의 협력에 기반한 자율규제 시스템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인터넷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법이나 공적 규제뿐만 아니라, 기술표준, 시장, 규범과 같은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현실에서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정부 뿐만 아니라, 다양한 참여자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멀티스테이크홀더(Multi-stakeholder) 모델, 혹은 멀티스테이크홀더 인터넷 거버넌스는 인터넷의 관리 및 공공 정책의 형성 과정에 정부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기업, 학계 및 기술계, 국제기구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의사결정 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은 ‘공공정책의 수립과 집행은 정부의 책임’이라는 전통적인 인식과는 괴리가 있다.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이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방식이 고정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세계 주소자원 관리를 위한 기구인 ICANN에서는 .com 과 같은 일반 도메인, .kr 과 같은 국가 도메인, 그리고 IP 주소 등의 정책 형성을 담당하는 지원 기구가 있고, 정부는 자문기구를 통해 참여하고 있다. 인터넷 관련 공공정책을 논의하는 포럼인 ‘인터넷거버넌스포럼(Internet Governance Forum, IGF)’은 공공기관, 국제기구, 업계, 학계, 기술계, 시민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멀티스테이크홀더 자문그룹’을 두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튀니스 어젠더 37항은 다음과 같이 멀티스테이크홀더 접근을 지지하고 있다.

37. 우리는 인터넷 거버넌스와 관련된 국제기구, 정부간 기구, 그리고 다른 기구의 활동의 조정과 그들 사이의 정보 교환을 증진하고자 한다. 가능한 모든 수준에서 멀티스테이크홀더 접근이 채택되어야 한다.

인터넷 거버넌스에서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이라는 새로운 방식이 호응을 얻게 된 것은 역사적인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즉, 초창기 인터넷의 형성과 확산이 민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인터넷 이전에 전신, 전화, 주파수 등 통신 정책은 UN 산하의 정부간 기구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서 관할해 왔으나, TCP/IP와 같은 인터넷 기술 표준이나 도메인 네임과 같은 주소 체계는 ITU가 아니라 IETF(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나 W3C(World Wide Web Consortium)와 같은 민간의 자율적인 기구에 의해서 형성되어 왔다. IETF나 W3C는 참여나 정책 형성 과정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의 세계적인 확대와 이용자의 급증에 따라, 인터넷과 관련된 공공 정책적인 이슈(예를 들어, 전자상거래의 발전에 따른 국가 경제에의 영향력 증대, 사이버 범죄의 증가와 이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 등)가 증대되어 왔으며, 정부는 인터넷 공공정책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즉, 정부가 주도했던 다른 공공 정책 분야와 달리, 인터넷 거버넌스 영역에서는 민간 중심으로 거버넌스가 이루어지던 영역에 정부가 뒤늦게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정책결정 권한을 가진 정부와 비정부 행위자 사이의 긴장, 그리고 앞서 인터넷을 도입했던, 그래서 거버넌스에서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 등 선진국과 뒤늦게 인터넷을 도입한 개발도상국 사이의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다.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은 이러한 긴장과 갈등 속에서 생성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최근 인터넷 거버넌스를 둘러싼 논쟁은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이 무엇인지, 여기서 정부와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책임과 역할은 무엇인지, 이에 기반한 세계 인터넷거버넌스의 제도화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현재 인터넷 거버넌스와 관련된 모든 이슈를 담당하는 단일한 기구는 없다. 도메인이나 IP 주소와 같은 인터넷 주소자원 관리는 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에서, 통신 인프라나 주파수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서, 인권 이슈는 UN 인권이사회에서, 지적재산권 이슈는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나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그리고 각 국가의 법령 등을 통해 인터넷 관련 이슈들이 다뤄지고 있다. 인터넷거버넌스포럼은 제반 이슈들이 논의되는 공간이지만, 강제력을 갖는 어떤 규범을 제정하지는 않는다. 세계적인 인터넷 거버넌스를 위해 어떠한 규범이나 협정이 필요한지, 어떠한 기구에서 이를 담당할 것인지 등 인터넷 거버넌스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