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정보문화 향유권
4. 특허
특허란, 고도의 기술적 사상(思想), 즉 ‘발명’을 보호하기 위해 권리자가 이를 일정 기간 동안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저작권은 별도의 심사 없이 창작 즉시 발생하는 반면, 특허는 발명자가 특허청에 특허를 출원하면, 특허심사관이 이를 심사하여 해당 발명이 새롭고(신규성), 획기적이며(진보성), 산업상 이용 가능할 경우 특허권을 부여하게 된다. 또한, 저작권은 다른 사람의 저작물을 베낀 것이 아니라면 저작물의 우수성과 관계없이 권리를 부여 받지만, 특허의 경우 독자적인 발명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유사한 발명에 대한 특허권이 있을 경우 권리를 부여 받지 못한다. 저작권은 ‘표현’을 보호하지만, 특허는 기술적 사상을 보호하므로 그 보호의 폭이 더욱 넓다. 저작권 보호기간이 저작자 사후 70년인 반면, 특허는 ‘특허를 출원한 이후 20년’이다.
특허 발명에 대해 독점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대신, 그 내용은 공개된다. 즉, 발명의 공개를 통해 지식의 확산을 도모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특허를 통해 발명 내용을 공개하고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 받는 대신, 그것을 영업 비밀로 보호할 수도 있다. 영업 비밀 역시 지적재산권의 하나로 볼 수 있는데, 역설계(리버스 엔지니어링)를 통해 기술 내용을 추적하기 용이한 경우에는 특허로 보호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업 비밀로 보호할 수 있으니, 이렇게 되면 기술 지식을 공개한다는 특허의 의미 자체가 반감될 수 있다.
초기에 물건의 발명에 대해 특허를 부여하던 것으로부터, 특허의 부여 대상은 생명체, 소프트웨어, 사업 방식 등으로 계속 확대되고 있다. “태양아래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특허의 대상이 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특허 제도의 목적은 결국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제1조(목적) 이 법은 발명을 보호·장려하고 그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여 산업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현행 특허 제도와 관련하여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낮은 수준의 발명에 대해 특허를 부여하는 경우, 오히려 기술의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 특허와 사업 방식(비즈니스 모델) 특허는 독점권을 부여하지 않아도 이미 빠른 혁신이 이루어지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독점권을 부여하여 오히려 기술 혁신을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의약품 특허는 의약품의 가격을 높임으로써 건강권과 생명권을 침해한다. 또한, 기술 개발에 대한 기여 없이 기존 특허를 사들여 소송 위협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특허 괴물도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로 선진국들이 특허권을 대다수 보유하고 있는데, 국제적인 특허권 통일을 통해 제3세계의 산업 발전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4-1. 강제실시
지나친 특허 독점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공공정책의 하나가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e)’이다. 강제실시란 국가 위급 상황이나 공중의 건강 보호와 같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특허권자의 허락이 없이도 정부나 정부의 허락을 받은 제3자가 특허 발명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실시’란 특허발명의 이용, 즉 생산, 판매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특허법의 목적이 특허권자에 대한 보호와 함께 사회 공공의 이익을 천명하고 있기에, 강제실시는 특허제도의 필수적인 장치이다. WTO의 트립스 협정 제31조, 그리고 우리나라 특허법 제106조의2(정부 등에 의한 특허발명의 실시)와 107조(통상실시권 설정의 재정)에서 강제실시를 규정하고 있다. 강제실시를 해도 특허권자의 권리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며, 특허권자에 대한 보상도 주어진다.
강제실시는 만성적인 의약품 부족 현상과 제약회사의 가격 폭리 정책에 대한 효과적인 억제 수단으로 평가 받는다. 실제로도 강제실시 요구가 빗발치는 대상이 바로 의약품이다. 미국의 경우 강제실시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로, 2001년 9‧11 사태 이후 탄저병 확산에 대처하기 위해 독일의 ‘바이엘’사가 공급하는 치료제인 ‘씨프로’에 대해 강제실시를 검토했다. 그 즉시 바이엘은 씨프로를 저렴한 가격에 미국에 공급할 것을 약속했다.
국내에서는 1961년 특허법이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네 차례의 강제실시 청구가 있었으나, 1978년의 강제실시를 제외하고 모두 기각 결정이 내려졌다. 이 중 2002년, 2008년에 각각 청구된 두 번의 강제실시는 모두 환자들이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2002년 1월 30일, 한 알에 약 25,000원이라는 높은 가격이 책정된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을 국내에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백혈병 환자들과 시민단체는 강제실시를 청구했다. 그러나 2003년 3월 4일 특허청은 “발명자에게 독점적 이익을 인정하여 일반 공중의 발명의식을 고취하고 기술개발과 산업발전을 촉진하고자 마련된 특허제도의 기본취지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만큼”이라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내린다. 2008년 12월 23일, 국내 에이즈 환자단체는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에 대해 강제실시를 청구했다. 제약회사 로슈가 정부가 제시한 푸제온의 가격에 불만을 품고 식약청의 시판 허가가 내려진 이후 4년 넘게 국내에 푸제온을 공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9년 6월 19일 특허청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특히 필요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판단하고 또 다시 기각 결정을 내렸다.
4-2. 소프트웨어 특허
전 세계적으로 특허 대상이 확대되고 있는 경향인데, 과거에는 특허 대상이 아니었던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이나 사업 모델(비즈니스 모델, BM)도 특허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2000년을 전후하여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BM 특허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이나 사업 모델에 특허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비판이 제기된다. 우선 특허를 부여하는 것은 일정한 독점권을 부여하는대신 기술을 공개하고 혁신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미 소프트웨어와 인터넷은 특허 없이도 빠른 혁신을 이루어왔으며, 오히려 특허로 독점을 부여했을 경우 혁신이 저해될 우려가 있다. 또한 현재의 기술 발전 속도를 감안했을 때, 20년의 특허 보호 기간이 만료된 이후에는 해당 기술의 효용성은 거의 없을 수밖에 없어 공공의 이익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 특히 소프트웨어 특허는 자유/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발전에 위협이 될 수 있는데, 자유/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같이 개발자의 참여와 공유에 기반한 소프트웨어일지라도 자칫 특허를 침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하지 않더라도 특허 침해가 될 수 있는데, 알고리즘의 특성 상 동일한 기능 구현을 위해 다른 방식을 모색하기 힘들고, 또 자유/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기존의 소프트웨어 특허를 사전에 검색하여 대응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0년 3월 4일, 진보네트워크센터와 정보공유연대가 BM 특허의 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해 삼성전자 ‘인터넷상에서의 원격교육방법 및 장치’ 특허에 대해 무효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2002년 12월 18일, 특허법원은 삼성전자 BM 특허에 대해 무효를 선고하였다. 이 소송은 BM 특허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이슈화 하기는 했으나, 소프트웨어 특허나 BM 특허 자체를 무력화 시키지는 못했다.
4-3. 의약품 특허
의약품은 원료가 되는 물질이 오롯이 의약품 그 자체가 되어 특허를 부여 받는다. 하나의 특허가 하나의 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의약품에 부여된 특허는 말 그대로 ‘완벽한 독점’을 가능하게 한다. 반면, 전자·기계 분야에서는 하나의 제품에 여러 개의 특허가 존재하여 어느 한 기업이 하나의 제품에 대해 기술을 독점하는 것이 어렵고, 때문에 특허 분쟁이 일어나도 종국에는 분쟁 당사자 간에 승패를 가르기 보다 상대방의 발명을 이용할 수 있게끔 계약을 맺는다. 그러나 제약 분야에서는 독점이 주는 이익이 큰 반면, 그 독점이 깨질 때 입는 피해가 기업의 존폐 여부까지 결정하기에 제약 산업에서는 다른 산업분야보다 특허 분쟁이 자주 발생한다.
제네릭 의약품은 특허로 보호 받는 의약품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발명으로 보이는 의약품을 통상적으로 일컫는 말로, 흔히 복제약 또는 카피(copy)약이라 불린다. 의약품에 대한 특허가 없거나, 특허 보호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특허를 가진 제약 회사 외의 다른 제약 회사는 제네릭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다. 제네릭 의약품의 가격은 같은 효능을 지닌 특허 의약품에 비해 매우 저렴하다. 일례로 스위스계 다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가 전 세계적으로 독점 생산하고 있는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은 2003년 국내 가격이 한 알에 23,035원이었다. 그러나 2003년 1월 인도의 제약 회사 ‘나코’가 생산하는 글리벡의 제네릭 의약품인 ‘비낫’은 한 알에 2달러, 약 2천원 정도였다. 당시 글리벡의 생산 원가는 845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허로 인한 독점, 이에 따른 높은 가격으로 인해 건강과 생명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만, 의약품 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특허 부여의 필요성이 주장 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상당히 거품이 많은데, 실제로 제약 회사의 재정 구조를 보면 연구·개발에 지출한 비용보다 마케팅 비용이 두 배에 이른다.
의약품에 대한 제약회사의 가격 폭리 정책은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첨예한 갈등을 낳고 있다. 남반구에 있는 제3세계 국가들의 사회적 기반을 흔들고 있는 에이즈는 이 갈등의 정점에 있는 질병이다. 1987년 최초의 에이즈 치료제인 ‘지도부딘’ 개발 이후 수십 종의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되어 대다수 선진국에서 에이즈는 당뇨나 고혈압과 같은 만성 질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여전히 에이즈로 인해 매년 2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그들의 대다수가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에이즈 치료제 가격은 그들의 1년 소득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에 2001년 11월 14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4차 WTO 각료 회의에서는 142개 WTO 회원국의 절반이 넘는 80여 개 국가들이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 확보를 비롯한 공공의 건강 보호가 제약 회사의 특허권 보호보다 중요하다”는 도하 선언문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도하 선언문은 지적재산권에 관한 트립스 협정이 공중보건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음을 주된 내용으로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으로 강제실시를 적시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 인권인 생명권과 건강권에 특허가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의약품 특허에 대한 엄격한 심사, 강제 실시, 그리고 공적인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와 같은 다양한 공공정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