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정보문화 향유권

5. 국제협약

특허, 저작권 등 지적재산권 제도는 각 국가의 법률에 따라 운영된다. 그러나 각 국가의 법률은 국제 협약이나 협정의 영향을 받게 된다. 미국, 유럽 등 지적재산권을 보유한 선진국들은 전 세계적인 지적재산권 제도의 통일과 강화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혹은 선진국의 정보통신, 문화, 제약 기업들이 국제 협약에 대한 로비를 통해 국제적인 기준을 형성하고, 이를 역으로 국내법에 반영하려고 하고 있다.

지적재산권 제도가 형성되는 초기에는 저작권에 관한 베른 협약, 특허와 관련된 파리협약 등 개별 제도별로 국제협정이 존재하였다. 이후 1967년 전 세계적인 지적재산권 보호를 목적으로 유엔 전문기구의 하나로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가 출범하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지적재산권 보호 수준이 한단계 높아진 계기는 세계무역기구(WTO)의 부속협정인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트립서 협정, TRIPs)>이 체결된 이후이다. 트립스는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최소 기준’을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조항의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집행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조약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최근에는 국제적인 지적재산권 강화를 위한 논의틀이 트립스나 WIPO와 같은 다자간 기구가 아닌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복수국가 협정으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 정부들과 다국적 기업들은 트립스 협정이 지적재산권 보호에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고, 보호 수준을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는데, WTO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지구화 시위로 99년 시애틀 각료회의가 결렬되는가 하면, 개발도상국 정부들의 저항으로 트립스 이사회도 미국의 의도대로 운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 등 선진국은 지적재산권 강화를 위한 논의틀을 FTA나 위조상품방지무역협정(ACTA)과 같은 복수국가 협정으로 옮기게 된다.

각 국가의 지적재산권 제도를 조율하기 위한 일정한 국제 협의가 필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국제 협정들이 주로 권리의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공정 이용이나 배타적 권리의 예외는 각 국가의 자율에 맡기는 반면, 배타적 권리의 보호는 그 최소 기준을 국제적인 수준에서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무역 협상과 연계되면서 지적재산권과 같은 공공 정책이 소수의 협상 관료에 의해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적재산권 제도는 한 사회의 문화나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보장해야 하며, 각 사회의 사회, 경제적 맥락을 고려하여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각 국가의 자율성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

5-1.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는 유엔(UN) 전문기구로서 지적재산권 관련 국제 협약들을 관장하고 있다. 1996년에 체결된 WIPO 저작권 조약과 실연음반조약은 공중송신권, 기술적 보호조치 등 디지털 환경의 저작권 문제에 대한 첫 국제적인 조약이다.

지난 2004년 8월 27일,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WIPO 개발 의제(Development Agenda for WIPO)의 수립을 위한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이 제안서는 WIPO가 그동안 지적재산권 권리자 및 선진국의 이익에 편향되어 있었음을 비판하며, 지적재산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개발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각 국의 개발을 촉진하는데 복무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각 국의 발전 수준과 상관없이 모든 국가에 높은 수준의 지적재산권 보호가 강제되어서는 안되며, 각 국의 발전 수준이나 독특한 사회적 요구를 고려하여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2013년 6월 17일-28일, 모로코 마라케쉬에서 개최된 WIPO 외교회의에서 채택된 <독서장애인을 위한 저작권 제한에 관한 국제조약> (International Treaty on Limitations and Exceptions for Visually Impaired Persons / Persons with Print Disabilities)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내용적으로도 독서장애인이 접근가능한 포맷의 저작물을,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제작, 복제, 배포, 공중송신하고, 각 국가 간에 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독서장애인의 저작물 접근권을 증진시킬 것으로 기대될 뿐만 아니라, 공정이용 혹은 저작권 제한을 의무화한 최초의 조약이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독서장애인을 위한 저작권 제한을 넘어 향후에는 여타 공정이용 영역도 각 국에 의무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5-2.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WTO TRIPs)

1996년에 발효된 트립스(TRIPs) 협정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결과 채택된  세계무역기구(WTO)의 협정들 가운데 하나로, WTO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최소한의 지적재산권 보호 기준이다. 트립스 협정은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지적재산권 제도를 국제적으로 통일하려는 목적 하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트립스 협정이 포괄하는 지적재산권의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협정을 위반했을 때 WTO 분쟁해결절차에 따라 무역제제가 가능하다는 점이 기존의 지적재산권 관련 국제 조약과 다르다.

트립스 협정의 내용은 정보·문화 산업에 경쟁력을 갖고 있는 선진국들의 요구가 대부분 관철된 것이다. 이 협정은 미국의 제약회사인 화이자와 전자회사인 IBM 등이 주도한 업체 연합에서 초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2001년 11월 14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4차 WTO 각료회의에서는 142개 WTO 회원국의 절반이 넘는 80여 개 국가들이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 확보를 비롯한 공공의 건강 보호가 제약회사의 특허권 보호보다 중요하다.”라는 도하 선언문을 이끌어 낸다. 도하 선언문은 지적재산권에 관한 트립스 협정이 공중보건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음을 주된 내용으로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으로 강제실시를 적시하고 있다.

이 선언문의 요구에 의하여 WTO 일반이사회는 2003년 8월,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를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개도국의 경우 의약품 특허를 강제실시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생산할 시설이 없어 트립스 협정의 강제실시 조항을 활용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결국 의약품 생산설비가 없는 나라(수입국)는 의약품 생산능력이 있는 나라(수출국)로부터 수입을 해야 하는데, 수출국에서도 같은 의약품이 강제실시되지 않으면 수입국의 강제실시는 무용지물이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이다.

5-3. 한미 FTA

2006년 2월 2일, 한미 양국 정부는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개시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한미 FTA는 농업, 문화, 보건의료 등 국내 산업 및 공공정책, 그리고 국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으며, 이에 제 시민사회단체들은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를 결성하여 한미FTA에 대해 반대하는 저항 행동을 전개하였다. 한미 FTA가 미칠 부정적인 영향은 지적재산권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적재산권의 지나친 강화는 거대 자본의 독점권을 강화하여 공정한 경쟁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문화적 권리와 건강권 등의 인권을 침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의약센터, 문화연대, 정보공유연대 IPLeft, 진보네트워크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 HIV/AIDS인권모임나누리+ 등 6개 단체는 2006년 4월 11일 ‘한미FTA 저지 지적재산권 분야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적재산권 협상이 가져올 파괴적인 영향에 대한 분석과 홍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2007년 4월 1일, 한미 FTA 협상은 타결되었다. 그리고 한미 FTA 비준동의안과 저작권법 개정안, 특허법 개정안 등 한미 FTA 협정 이행을 위한 관련 법률 개정안이 2011년 11월 22일,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었다.

최근 지적재산권 관련 국제적인 동향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국제적인 지적재산권 강화를 위한 논의틀이 세계무역기구(WTO)나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등 다자간 기구가 아닌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복수국간 협정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 둘째는 권리의 내용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지적재산권 집행의 강화로 초점이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적재산권 집행’이란 지적재산권 권리의 보호를 실효성있게 관철하기 위한 행정조치 및 민, 형사 사법조치를 의미한다. 한미 FTA 협정에서도 저작권 보호기간을 70년으로 연장하는 등 ‘권리 보호 수준의 강화’와 함께, 지재권 챕터의 거의 절반을 집행 조항이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집행 조항’이 핵심 축을 이루고 있다. 한미 FTA, 그리고 뒤이어 체결된 한EU FTA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자리 잡고 있다.  

5-4. 위조 및 불법복제방지 국제협정 (ACTA)

위조 및 불법복제방지무역협정(ACTA)은 2006년 미국과 일본이 위조 상품이나 저작권 침해품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무역협정이 필요하다는 공식 제안을 하면서 만들어졌다. 2006-2007년에 개최된 사전협의에는 캐나다, 유럽연합, 일본, 스위스, 미국이 참가하였고, 2008년 6월에 한국을 비롯한 호주, 캐나다, 멕시코, 모로코,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이 참여하였다.

이 협정은 위조상품과 저작권 침해품이 국제적으로 대량 유통되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로 제안되었으나, 실제로는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민사 소송이나 형사 소송의 특별한 규칙을 만들고, 세관 당국에 의한 국경 조치를 강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를 규제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2012년 7월 4일, 유럽의회는 이 협정을 반대 478, 찬성 39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시켰다. 유럽연합 시민들은 ACTA가 인터넷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불법복제 단속을 명분으로 인터넷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의약품에 대한 접근을 위축시킬 것을 우려하며, 세 차례에 걸쳐 유럽 전역의 동시다발 시위를 벌이는 등 거세게 반대해왔다. 유럽의회에서 ACTA가 결국 부결된 것은 이와 같은 유럽 시민들의 우려를 유럽의회 의원들이 반영한 것이다.

ACTA 부결 후 환호하는 유럽의회 의원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ACTA 부결 후 환호하는 유럽의회 의원들 (출처 : http://keionline.org/node/1454)